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단 편집) === 한국 ===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근현대사의 인물 중에선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쇼와 덴노|히로히토]], [[도조 히데키]], [[이시하라 신타로]],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등과 함께 한국 입장에선 좋게 볼 수 없는 일본인 중 한 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다만, 전근대시대 인물에게 손가락이 6개였다느니하는 기록은 좀 걸러서 해석해야한다. 당대 [[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기형은 [[마녀]]나 악마 숭배자의 상징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고의로 특정인을 까내리려고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은 흔했다[*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도 앞선 시대의 인물인 [[앤 불린]]도 정적들에 의해 [[다지증]]이라는 [[가짜 뉴스]]가 퍼지는 굴욕을 당한 일화가 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도 먼저 [[가톨릭]] 탄압을 시작한 인물인 만큼, 그 가톨릭의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그를 좋게 표현했을 리도 만무하다. 일단, 그가 [[다지증]]이라는 풍문은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사극 징비록에도 나타나 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라고 했다.[* 히데요시가 반역자인지 어떤지에 대해 여기서도 토론이 있었다. 통상 반역을 주인에게 가야 할 권리를 부하가 빼앗는 행위로 해석한다면 히데요시는 [[오다 히데노부]]에게 가야 할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결과적으로 볼 때 빼앗은 셈이므로 히데요시도 반역자이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니 당시 일본에서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와 서열이 뒤바뀌어 있기는 하나 [[요도도노]] 등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히데요시의 배려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훗날 가문이 이어져서 메이지 시대 당시 [[자작(작위)|자작]]급은 될 정도로 그 세력을 유지했다. 중국식으로 보면 [[이왕삼각]]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할 수 있을 듯싶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명히 오다 가문에게 가야 할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오다 가문에게 무슨 정통성이 있다고 보기는 또 어렵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오다 가문부터가 원래 가문을 하극상한 가문의 분가였다. 원래 가문의 신하였다가 하극상을 통해 그 자리를 빼앗은 사이토 도산과도 비슷하다.]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도 일부 이본에서는 평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병권을 장악한 뒤 왜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관백이라 칭했다는 설정이 나온다.(경판본) 근데 좀 뜬금없게도 [[사쓰마]] 출신이고, 어머니는 납치당한 중국인.[* 단 완전 뜬구름 소리는 아닌 게 징비록에도 틀리기는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출신이라는 서술이 있다. 아마도 당시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출신이 아닌 중국 출신으로 보았고 때문에 임진록에서도 이런 설정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조일 관계가 정상화되고 상당히 악감정이 해소되어 일본에 대해서 꽤나 좋게 평가하게 된 이후의 조선 통신사들도 히데요시에 관한 문제만큼은 늘 민감했고 임진왜란 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어도 적어도 왜란 이후의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용서 못할 국적이자 침략자, 천하만민의 원수'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래도 예외가 있기는 있었으니, 1763년 당시 서기(書記)로 파견된 원중거(元重擧)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행 후 일종의 일본 백과사전인 '화국지(和國志)'를 쓰는데, 여기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도요토미를 까면서도 '중국으로 치면 [[시황제|진시황]]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이것은 시황제가 한창 전국통일 이룰 때까지 영민하고 노련한 통치자의 수완을 발휘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교만과 독선에 허황된 망상에 빠져 나라를 떠받들 중요한 후계자를 내치고, 충신을 죽이고, 백성들을 시달리게 하여 패업을 제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과 같게 본 것이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선 ‘그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단 낫다’는 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숙종(조선)|숙종]] 때는 히데요시를 모신 사찰에서 조선 통신사들의 연회가 열렸는데, 히데요시를 모신 절이라는 걸 알게 된 통신사 일행이 노해서 항의하는 바람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 측은 얼버무리기 위해 '''가짜''' 사료를 들고 와서 '이 절은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이며 히데요시와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으로 해명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자 통신사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연회가 재개됐다고 한다.[* 그 절은 히데요시와 히데츠구가 증축한 덕에 도요토미 가문을 떠받들고 있었다. 철저하게 도요토미 세력과 그 일족을 몰살한 이에야스였지만, 그 지지자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서 방치한 것이다. 즉 새빨간 거짓말.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봐 거짓 자료를 가지고 와서 출전이라면서 증거로 제시해 통신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연회를 취소하고 국교를 파토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 통신사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 가짜 문서를 가져와 보여준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였는데, 신유한의 사행기록인 <해유록>에는 그때 아메노모리는 조선 통신사들이 끝내 접대를 거절하자 분해하면서 칼까지 빼려고 하는가 하면, 조선통신사들에게 그 가짜 기록을 보여주고 난 다음 날에도 실무 맡은 일본 측 관리들에게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가며 마구 갈구고 통신사들에게도 "저희가 아니라고 문서까지 가져와 보여드리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안 믿어주시니 너무 섭섭합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되어 있다.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였던 아메노모리로써는 조선통신사들의 강경한 태도는 쓰시마 번이나 실무 관료의 총책임자격인 자신에게 화살이 다 돌아오는 만큼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